“민주주의 추상명사”라며 사랑한 광주에 눕는다 | |
[리영희 선생 별세] 리영희와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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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정대하 기자... |
“참 눈빛이 맑으신 분이셨어요. 투사의 얼굴에 지사의 모습….” 7일 오후 1시께 광주 와이엠시에이(YMCA) 2층 무진관에 마련된 고 리영희 선생 분향소를 찾은 임선숙(45) 변호사가 국화 한 송이를 영전에 바쳤다. 그는 2007년 5월 5·18기념문화회관에서 광주를 찾은 고인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임 변호사가 “아, 선생님”하고 인사를 드리자 리 선생은 “아, 나를 알아요?”하고 물었다. 임 변호사가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 책을 많이 읽었어요”라고 대답하자 리 선생은 맑게 웃었다고 한다. 생전의 리영희 선생은 광주와 인연이 깊었다. 그가 광주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유신독재가 극한을 치닫던 1970년대 말이었다. 1977년 11월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을 낸 그는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했다는 이유로 2년여 동안 고초를 겪던중 1979년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을 수용한 특별사동에서 1년을 보냈다. 당시 리 선생은 0.9평의 감방에서 <한국의 불교사상>, <원각경 강의> 등 불교 서적을 탐독했다. 기자 시절 독주 ‘배갈’을 즐겼던 고인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광주형무소에 들어가 정시·정량·정질·정규로 식생을 하니 저절로 위병이 치료가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 추모 특별 대담] ‘리영희를 말하다’ 그가 다시 광주를 만난 것은 1980년 5월17일. 그는 이날 밤 11시30분 자택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고초를 겪고 60일만에 풀려나왔다. 리영희 선생은 부인한테서 광주 학살 이야기를 처음 전해듣고 “수천명을 학살?… 군대가?… 광주에서?…”라며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두달 전 발행된 호외와 신문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5·18민중항쟁의 ‘배후조종자’로 몰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는 ‘광주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1993)라는 글에서 ‘민주주의 추상명사’라는 말로 ‘광주’에 헌사를 바쳤다. 그는 1980년 5월18일을 한국 현대사의 시대적 분기점으로 보았다. “광주는 남한의 한 지방의 지도에 표시된 작은 도시명으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동시대적 세계의 한 이념이 되었다. 광주는 ‘광주’가 되었다. ‘광주’는 폭력과 부정에 항의하여 목숨을 바치는 민주주의적 시민의 용기와 감동적인 희생정신을 뜻하는 추상명사가 되었다.” 평북 출신으로 항상 북녘의 고향을 그리워했던 고인은 그래서 자신의 주검은 광주에 묻히기를 평소 희망해 왔다. 고인의 희망에 따라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공동위원장 고은 백낙청 임재경)는 8일 오전 7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영결식을 치른 뒤 수원 연화장을 거쳐 오후 4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고인의 유해를 안장할 예정이다. 리영희 선생 광주전남장례위원회 류봉식 집행위원장은 “고인의 삶과 죽음에 분단의 모순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며 “하관에 앞서 김준태 시인의 추모시와 ‘씻김소리’ 한 대목을 바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기사등록 : 2010-12-07 오후 07:49:57 기사수정 : 2010-12-07 오후 09:21:25 출처: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52604.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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