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구정광대다라니경> 통일신라의 ‘자랑’ 세계 최고 다라니경 연대 ‘의심’ | |
국립중앙박물관, 1966년 발견된 석가탑 중수기록 분석 | |
노형석 기자 | |
그림자 없는 탑, 아사달 아사녀의 슬픈 전설 서린 신라 무영탑이 후대에 태산 같은 화두를 던진다. 신라고찰 경주 불국사의 상징이며 8세기초 세계 최고 인쇄물이라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품었던 석가탑은 21세기 끝간데 없는 논란에 휩싸여, 미궁의 탑이 되고 있다. 1966년 도굴로 허물어진 석가탑을 해체 수리할 즈음 탑 안 사리기 구멍에서 떡처럼 뭉쳐서 나온 먹글씨 종이뭉치(묵서지편)가 논란의 도화선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중박)이 2007~2008년 이 종이뭉치 명문을 해석한 결과 서석탑(석가탑)과 무구정광탑(현재 석가탑, 다보탑 여부를 놓고 논쟁중)이란 두 탑의 중수기록으로 확인됐다. 고려 현종 15년인 1024년 무구정광탑이 지진으로 무너지고 정종 4년인 1038년에도 서석탑이 지진으로 무너져 대규모 중수가 있었으며, 중수 당시 다라니경 등의 경전과 여러 보물들을 다시 집어넣은 사실이 밝혀졌다. 후폭풍은 컸다. 단 한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명품탑 신화는 무너졌다. 세계 최고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다라니경 제작 연대 또한 의심을 받게 됐다. 석가탑은 한국 고대 미술사·불교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불온한 온상이 된 셈이었다.
중박이 최근 석가탑 유물 보고서 3권(사리기·공양품)과 4권(보존처리 분석)을 내고 ‘조용히’ 보고서 작업을 끝냈다. 보존과학처리팀과 미술부, 유물부 학예사들이 사리기 등 주요 유물들을 분류, 분석한 결과를 담은 3, 4권은 다라니경 등의 경전 분석을 담은 1권과 묵서지편 등 중수문서의 해석을 담은 2권을 보완하는 성격이다. 3, 4권의 내용을 보면, 석가탑은 11세기 중수된 외에도 고려 후기, 심지어 조선시대까지 몇차례 큰 수리를 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과장은 3권에 실린 ‘석가탑 내 사리장엄구 고찰’ 논고를 통해 탑 안에서 통일신라 금동사리외함과 별개로 양식이 다른 고려 양식 사리기들이 세 갖춤이나 더 나온 것은 후대 탑을 수리하면서 계속 다른 유물들을 집어넣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고 지적했다. 이 세 갖춤 사리기들-달걀 모양의 은제 사리외합, 네모반듯한(방형) 금동제사리합, 작은 은제사리항아리(소호)는 양식과 모양새, 표면에 새긴 어자문(동그라미떼 무늬) 등의 문양으로 미뤄 고려 중후기에 들어간 것이란 견해다. 탑이 1960년대 해체수리 전부터 이미 숱한 훼손으로 보수가 거듭되었음이 확실해진 셈이다. 문제는 서석탑과 무구정광탑 중수기에 넣었다고 기록된 공양품과 1966년 수습한 탑 속 유물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 과장은 “금동방형사리합과 은제사리소호 등 사리 갖춤 2종류와 비천상, 동경(구리거울), 먹, 은제 매화판 등은 중수기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은제 매화판의 경우 조선시대 여성 머리 장식과 모양이 거의 같아 조선시대 탑 수리 때 들어갔을 것이란 추정까지 나온다. 중수기록 또한 적잖이 훼손된 만큼 다른 물품들이 누락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번 보고서 3, 4권에 실린 중박 연구자들의 논고는 중수기의 무구정광탑은 석가탑이 아니라는 견해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무구정광탑 중수문서에 나타난 ‘전금병’, ‘도금합’이란 사리장치와 작은 석탑 등의 공양품이 현 석가탑 안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동신(서울대), 최연식(목포대) 교수 등 소장학자들은 이미 2007년 무구정광탑이 다보탑이란 설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중박 연구자들은 보고서에서 ‘무구정광탑=다보탑’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학계 일부에서는 무구정광탑 중수기에 기록된 공양품들은 다보탑에 그대로 안치됐고,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다보탑 수리과정에서 몰래 반출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편다. 우리 문화재 반출로 악명이 높았던 일본 상인 오쿠라의 컬렉션 중 일부인 경주 출토 사리기 갖춤이 바로 다보탑의 사리갖춤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다보탑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다보탑의 중수기와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왜 굳이 석가탑에 옮겨 넣었을까란 의문 앞에서는 아직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학계는 갈라졌다. 젊은 소장학자들은 상당수가 석가탑 다라니경은 고려시대에 넣었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중견 원로 학자들은 묵서지편이 다라니경의 신라 제작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한다는 견해를 굳히고 있다. 숭고한 처마선으로 빛나는 석가탑은 문화재 학계에서 더욱 뜨거운 감자로 변하는 중이다. 이병호 학예사는 “묵서지편 공개 당시의 열띤 논란과 달리 지난 연말 탑 유물이 원 소유주인 조계종으로 이관된 뒤 학계의 논의는 사실상 물밑으로 가라앉은 상태”라며 “석가탑 유물에 대한 총체적인 자료작업이 갈무리된 만큼 앞으로 탑 유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학제간 논의를 더욱 활성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09723.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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