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목화씨’ 신화 깨졌다. | |
800년 앞선 백제시대 면직물 확인 | |
‘문익점의 목화씨’ 신화가 깨졌다. 고려말 문신 문익점(1329~1398)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숨겨 들어와 키우면서 이 땅에서 무명천(면직물)을 처음 짜기 시작했다는 교과서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 최근 충남 부여 능산리의 6세기 백제 절터에서 나온 백제산 직물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 실물로 확인됐다. 국내 면직물의 역사가 800년 이상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최근 능산리 절터 출토품 분석 과정에서 1999년 조사 당시 유적 저습지에서 목기류와 함께 나온 직물 덩어리(폭 2㎝, 길이 약 12㎝·사진)가 국내 최고의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15일 발표했다. 박물관 쪽은 이 직물이 6겹으로 접힌 덩어리 모양으로,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심연옥·정용재 교수팀과 함께 주사전자현미경으로 종단면을 살펴본 결과 식물성 셀룰로오스 섬유의 특징인 완두콩 형상의 결정 구조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같은 출토 층위에서 567년 백제 창왕(위덕왕) 때 만든 사리감이 나와 당시 백제의 직물임이 확실하다”는 설명이다. 현재까지 보고된 국내 최고 면직물은 경북 안동의 고려 말 태사자 묘에서 나온 소가죽 장화 안감에 붙은 직물이다. 심 교수는 “씨실을 강하게 꼬아 쓰는 독창적 직조수법 등으로 미뤄 당시 외국에서 백제로 목화씨가 전해졌으며, 면직물 자체를 백제에서 생산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목화는 고대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비단길 등을 거쳐 중국, 한반도에 전해졌다. 국내 재배와 생산은 <고려사> 기록 등에 따라 문익점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학계 일부에서는 이론을 제기해왔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면직물의 중국 명칭인 백첩포 40승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고, 당의 사서 <한원>에도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짰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확인된 백제산 면직물은 옛 기록을 실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이 면직물은 박물관의 능산리사지 특별전(8월15일까지)에 전시중이며 분석 성과는 오는 10월 박물관 국제학술심포지엄에도 보고될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
기사등록 : 2010-07-15 오후 07:08:38
출처: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0555.html
“문익점보다 800년 앞서 한반도서 목화 재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사진)이 확인됐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시점보다 800년 앞선 것이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온 면직물인 ‘백첩포(白疊布 또는 白布)’로 추정하고 있다. 백첩포는 중국인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만든 면직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당시 국내에서도 만든 기록이 나온다. 백첩포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면직물과 함께 출토된 ‘창왕명사리감’의 제작연도가 서기 567년인 것을 감안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1363년(공민왕 12년)에 비해 800년이 앞선 것이다. 국내에서 보고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은 안동 태사자 묘에서 출토된 흑피화(검정색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 안감에 쓰인 것이었는데, 그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 때이다.
99년 발견 당시 이 고직물(古織物)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섬유와 실의 상태, 직물의 조직 등이 잘 남아 있어 분석이 가능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고직물의 정확한 용도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의류의 안감보다는 단일 용도의 물품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물관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조법과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 방식의 직물로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다”며 “백제인의 독창적인 직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사·분석에 참여한 심연옥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는 면직물의 기원·전래와 관련, “문익점이 면 종자를 유입하기 전에 국내에서 면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며 “면직물문화 발상지인 인도나 목화 재배에 적합한 아열대 환경이었던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 전래돼 우리 풍토에 맞게 품종을 개량해 토착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는 또 “<한원(翰苑)>에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는 구절이 나오고,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경문왕조(869년)에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布)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당시 백첩포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직물은 아니며 외국과의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등 극히 귀하게 사용된 직물이었는데, 고려 시대로 가면서 생산량이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박물관과 연구진은 오는 10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고 추가 분석 등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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