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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마을은 고인돌을 가운데 두고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산다. |
ⓒ 심홍섭 |
부안에 가면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시골길이라 얼마나 복잡하겠는가마는 제법 넓게 형성된 부안 벌판에 놓인 길을 가다보면 꼭 길을 잃고 만다. 내가 길을 잃은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내 청색시대의 부안은 곧 격포 바다였다. 애인과 가면 십중팔구 헤어진다는 아름다운 그곳. 바닷가 봉화산 정상의 팔각정에서 울리던 팝송과 노을진 바닷가의 단상이 한꺼번에 오버랩 된다. 내가 왜 이토록 부안의 오래된 이미지에 갇혀 있는가 했다. 그래서 애써 부안으로 가는 길을 멀리하거나, 한번 들었다 하면 길을 잃고 만다.
바구 아홉 개가 있어서 구암?
나도 모르게 격포 쪽으로 가면서도 작은 길로만 접어들었다. 그러다 길을 멈춘 것은 ‘바위 암(巖)’자 때문이었다. 성암이니 구암이니 하는 ‘巖’ 자. 이런 곳에는 틀림없이 고인돌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고인돌이 있는 마을이 구암(龜巖)마을이다.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된 고인돌은 20여 호 되는 마을 한가운데에 마치 터주대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인데 이렇듯 마을 한가운데에서 대접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고인돌은 행복한 고인돌이다. 농사짓기 불편하다고, 길 넓히는데 걸림돌 된다고, 포크레인으로 깨서 없어지고, 땅속에 파묻히는 등 수난을 받는 고인돌과는 다르지 않는가. 또한 고인돌 10여 기가 모여 있는 일대를 예쁘장한 담장으로 울타리를 쳤으니 이보다 더 좋은 대접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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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암이니 구암이니 하는 ‘암(巖:바위)’ 자. 이런 곳에는 틀림없이 고인돌이 있다. |
ⓒ 심홍섭 |
왜 구암마을이라고 부르냐 하니 마을사람들은 “바구가 아홉 개가 있어서 구암이여!”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인돌은 모두 10기이고 안내판에는 13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마을사람은 여전히 아홉 개라 한다.
20여 년 전에 완전히 마을을 떠난 수원 백씨들이 세를 부리며 살았는데 그때 백씨 집안에 있던 고인돌이 현재의 문화재로 지정된 고인돌이다. “아마 세를 부리고 살라고 고인돌 사이에다 터를 잡았겄제.”
마을에 배꼽자리(탯자리)를 둔 김종철(80) 할아버지는 어릴 적 마을 현황을 훤히 알고 있다. 해금 금씨(김해 김씨)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김 할아버지는 수원 백씨들의 세가 인동에서는 짱짱하여 보통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말도 말어, 동네 입구에서부텀 길 양쪽으로 사꾸라를 일본에서 갖고 와서 심었는디, 얼마전까지만 해도 봄 되믄 굉장혔제. 인동에 있는 학교에서는 죄다 이리 소풍 왔어. 근디, 희한혀. 그 집안사람들이 마을 뜨고 난께 나무가 다 죽어불데?”
혹시 사진 찍은 거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별 쓰잘데기 없는 것을 묻는다고 한다. 하긴 그 시절,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사진기가 어디 있으며, 사진 찍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지금은 바싹 마른 사꾸라의 밑둥치만 남아 그들의 영화를 힘겹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던 집안이 ‘쫄딱’ 망해서 동네를 뜬 건 아마도 고인돌 때문이라고 한다. 집안에서 부리던 머슴이 땅속에 박혀 있던 고인돌을 깨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넘 무덤을 함부러 건들면 쓰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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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홍섭 |
대문마다 핵폐기물 반대 노란 깃발들 여전
직접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설명을 해주는 김 할아버지는 신명이 났다. 고인돌은 잘 몰라도 마을의 역사는 훤히 꿴다는데 간혹 고인돌을 보러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직접 설명도 하는 할아버지의 고인돌과 마을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문화재 안내판 앞에서는 열을 올린다.
“이 안내판 좀 봐요. 글씨도 제대로 못 쓴단 말이요. 한자로는 ‘거북 龜’자로 써 놓고는 한글로는 ‘구’라고 안 써 놨소. 나가 면장한테 가서 ‘귀’자로 바꿔달라고 해도 도루묵이요. ‘구’자에다가 작대기만 하나 대믄 될 것을. ‘거북 귀’자를 ‘구’자라고도 한다고 하는데 나가 옛적에 서당에서 배울 적에는 ‘귀’자로 배웠지, ‘구’자로는 안 배왔어!”
전북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구암마을은 ‘구암리 지석묘군(支石墓群)’ 문화재만큼의 명성에 맞지 않게 작은 마을이다. 마을 뒤 기상봉 자락 정심골(井心谷)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서면의 제법 넓은 벌판을 적시는데 그 물줄기를 끼고 마을은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40여명도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마을 골목을 돌아다녀도 사람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남자는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그래서인지 작고 예쁘장한 마을회관에는 남자들은 없고 아낙들만 모여 있다. 대부분의 동네를 가면 화투놀이를 하는데 구암마을 회관은 아낙들의 살아가는 얘기 속에 웃음만 가득하다. 회관 유리문에 붙은 ‘핵 없는 세상’ 스티커가 빛바랜 채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핵 폐기장 반대 데모할 때 동네 분들은 모두 참여했어요?”
“그 말 흐기 전에 한번 물어봅시다. 핵 폐기장을 찬성흐요. 반대흐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에 핵이 있으면 되겠어요?’라는 말에 누워 있던 아주머니도 벌떡 일어나 앉는다. 동네 사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나서서 데모했다는데 각 대문마다 걸려 있는 노란 핵폐기장 반대 깃발이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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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 반핵의 깃발은 집집마다 걸려 있다. |
ⓒ 심홍섭 |
해마다 고인돌 앞에서 신명나는 풍년기원제
바다가 가까이에 있지만 ‘거기하고는 상관이 없고 담배 묵고 살었어’ 하는 동네사람들 말처럼 구암마을 사람들은 기상봉 자락 야트막한 산자락에 형성된 밭에서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며 살았다. 지금은 밭을 논으로 쳐서 논농사가 대부분이지만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담배농사와 함께 하는 모양인지 쌀보다는 담배 얘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은 군에서 고인돌 있는 디를 백씨들한테서 매입을 해서 그렇지, 백씨들 땅일 때는 들어가 보덜 못했소. 긍께 동네에 고인돌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산 사람이 흐다흐요(많소). 백씨들도 집안에 있는 고인돌이 걸거쳤을(걸치적거렸을) 테지만 요렇게 잘 생긴 고인돌을 맘대로 못했제. 그 덕에 세도 부리고 살았제.”
백씨 집안 머슴의 실수가 아니었다 해도 그런 세도도 영원한 건 없는가 보다. 이렇게 터가 센 곳인지라 마을 동제가 있는가하여 물어보았다.
“예전에는 있었제. 당산제가 있어서 정월대보름이 되믄 걸립(풍물놀이)을 하고 돌아다녔제. 지금은 사람도 없고 해서 안흔 지가 상당해. 대신 하서농민회에서 제를 모시제.”
하서농민회에서 주관하여 춘분 무렵 좋은 날은 선택해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선사문화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고인돌 앞에서 풍년기원제를 8년 전부터 지낸다고 한다.
“그때는 참말로 신명지제. 그렇게 한바탕 놀아야 농사를 짓제. 암.”
상서초등학교의 전신인 부서국민학교에서 소화(昭和) 2년에 졸업을 했다고 일본 연호를 정확히 기억하는 김 할아버지는 내가 연표를 꺼내어 연도를 확인하자 메모지에 따라 적는다. “나가 언제 입학했는지 알아 둘라고.” 그래서 졸업연도까지 확인해주니 상기된 표정으로 받아 적는다. 일제시대에 일본 놈들 밑에서는 절대 공부 못시킨다는 아버지 고집 때문에 서당에서 잠깐 동안 배운 한자 공부를 지금껏 밑천으로 삼는다고 한다. 서울에서 재단사 한다는 막내 아들네한테 쌀을 보내야 한다면서 쌀 포대를 묶는다. “이렇게 자식놈들한테 쌀 부쳐주고 사는 재미로 살제. 나가 직접 지었응께.”
김 할아버지의 정성을 뒤로하고 마을 옆 초등학교로 갔다. 혹 마을로 소풍 왔다가 찍은 단체사진이라도 있을까 싶어 갔는데 학교는 문을 꽁꽁 닫았다. 차라리 내 상상 속에서의 화려한 봄날의 구암마을 풍경만 갖고 가는 게 좋겠구나 싶다.
자주 길을 잃었어도 부안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곳이다. 돌아가는 길에 새만금 간척지에 들어갈지도 모를 매향비를 본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만큼 세월이 지나서 다시 부안에 들러도 아름다웠노라고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