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을 얻는 지혜…중국판 ‘목민심서’

청나라 지방관 녹주의 재판기록
중국사연구 대가 미야자키 해석

한겨레 허미경 기자
» 〈녹주공안〉




〈녹주공안〉
남정원 지음·미야자키 이치사다 해석·차혜원 옮김/이산·1만5000원

청나라 옹정제 시대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던 시절이다. 부지런하기로 유명짜한 옹정제에게 재임 초기 골 아픈 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광둥성 조양현이라는 지방에 3년 연속 흉년에 지진까지 겹쳐 민심의 흉흉함이 극에 달했다. 당연지사, 조세 업무는 마비상태. 그 현(縣)의 책임자 ‘지현’ 자리에 나름 유능한 젊은 관료를 파견했으나 매번 실패. 누구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첫 번째 지현은 직권남용(汚職)으로 검거, 두 번째는 무능하여 조세를 예정액의 2할도 걷지 못하였고, 세 번째는 관원의 파업으로 직무 수행이 불능하여 사직, 네 번째는 회계 부정. 네 명의 전임 지현이 성(省)으로 불려와 옥에 갇혀 취조를 받는 전대미문의 불상사 발생이라.

하여 다섯 번째 지현을 뽑는데, 내무부 장관(이부상서)이 후보자 셋을 천거하니, 1순위는 청렴결백한 인물. 옹정제는 곤경에 처한 백성은 너무도 힘든 나머지 생존을 위해 법을 어길 수밖에 없으니, 외려 좀 부패한 관리라면 뇌물을 주고라도 모면할 방도가 있겠지만 청렴 관리의 손에 걸리면 즉시 끝장이라며 불합격 처리. 2순위 후보는 매사 과단성 있는 인물. 이 위인도 옹정제는 그리 적극적인 정책 집행자가 부임하면 백성이 다 도망칠 것이라며 또 불합격! 하여 3순위 후보자로 녹주 남정원이 오른다. “이자는 어떤 인물이냐.” “매사 경중을 분별할 줄 아는 사내이옵니다.” 이에 옹정제가 무릎을 탁 친다. “바로 이자다. 그를 부르라.”

» 청나라 때의 재판 광경과 지방관 녹주 남정원의 초상. 이산 제공

(옹정제 )“조양현은 천재(天災)가 계속되어 백성이 고통에 빠져 있다. 자신 있느냐?”

(녹주) “외람되오나 많은 경우 천재보다는 인재(人災) 쪽이 훨씬 그 피해가 심한 법이옵니다.”

(옹정제) “말 한번 잘했다. 부임한다면 무슨 일부터 할 생각이냐?”

(녹주) “도둑을 잡고 나쁜 놈들을 몰아낼 생각입니다.”

(옹정제) “곤궁에 빠진 백성은 어찌할 테냐?”

(녹주) “백성들은 대체로 현명합니다. 몇 년 뒤 날지 모를 재난까지 셈에 넣어 장래를 계획하지요. 천재에 과장된 소문을 퍼뜨려 쌀값을 올려 사리를 꾀하는 자들, 흉작을 핑계로 조세를 납부치 않고 빈민에게 전가하는 철면피 부자들. 이런 짓은 그냥 용인되는 건 아니기에 권력자 측근에 뇌물을 보냅니다. 사실 부자나 투기꾼 중에 이런 도둑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못된 자들을 재해 때는 특히 전력을 다해 퇴치해야 합니다. 못된 자일수록 말솜씨가 뛰어나고 권력과 금력까지 갖추었으니 자칫 민간의 분위기를 제 쪽으로 끌고 가 여론을 왜곡시킵니다.”

이상은 <녹주공안>(鹿洲公案)을 해석하고 해설을 붙인 중국사 연구의 대가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재현한 옹정 5년 녹주 남정원(1680~1733)의 지방관 발탁 과정이다. ‘현’은 지방행정구역상 가장 말단 단위이지만 제국 통치의 출발점이니, 현의 정치·행정·사법의 총책임자라 할 ‘지현’을 파견하는 건 황제에게도 녹록잖은 숙제였다.

<녹주공안>은 이렇게 발탁된 녹주 남정원이 광둥성 조양현과 보령현의 지현으로 2년간 재직하며 행한 재판을 기록한 것이다. ‘공안’은 소송사건이란 뜻인데, <녹주공안>에는 명판관 녹주가 다룬 민형사소송 23건의 전말과 해결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녹주가 조양현에 당도하자 맨 먼저 관원들의 파업이 그의 정치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토호와 유력층의 신분을 박탈하겠다는 녹주에게 현의 관원들은 그런 과도한 방책은 집행할 수 없다며 집단파업을 감행하지만 녹주는 되레 파업을 ‘권장’하는 맞불작전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관원의 권력 남용, 가족내 구타 치사, 시체 도둑, 인신매매, 무고와 맞고소, 폭력단 퇴치, 유산을 둘러싼 형제간 송사 사건 등에서는 곤궁한 백성들의 거짓말과 뭇 인물이 직조하는 복잡한 내막을 파고들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현미경을 댄 듯 세밀하게 기록된다. 18세기 초 중국 민초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 이를 백성들의 생생한 대화와 육성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압권이다. 지방관의 최우선 임무는 징세였기에, 윗선 관료의 제 식구 감싸기로 곤경에 처했다가도 징세 관원과 결탁한 유력 토호층의 탈세를 가차 없이 파고드는 모습에선 쾌감마저 느껴진다.

글을 모르는 노파가 송사문을 작성하지 못해 ‘백지’를 들고 왔으되 노파의 말을 서기에게 받아 적게 하여 억울함을 풀어준달지, 사건이 커지면 관련자 전원을 ‘성’으로 보내 몇 달간 취조를 받게 해야 함에도 천재와 인재의 겹고통에 놓인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려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융통성’이 말하자면 지방관 녹주의 ‘경중을 헤아리는’ 지혜다. 이것이 그가 드러내려는바 ‘사회 정의’에 가까운 길이요, 이로써 민심을 얻는 방도였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5692.html

Posted by Kukulc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