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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호에서의 뱃놀이(1940년 촬영). 1930년대 말엽 호수의 7할을 메워 택지로 바꿨다. 호수의 남은 3할은 봄부터 가을까지 작은 배를 띄운 보트장으로 쓰였다. |
늦어도 우리네 증조부모 시절쯤은 됐을 것이다. 광주읍성의 동문 밖 지금의 계림동 일대는 그 시절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산들은 먼발치로 물러나 있었고 벌판엔 이렇다 할 마을조차 없었다. 한참을 더 가야 우산동 언덕 아래에 경양역(景陽驛)이란 역참이 있어 큼직한 구욋집들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구욋집들도 호기롭게 너른 벌판의 광막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보시기를 엎어놓은 듯이 봉곳하게 솟아오른 중흥동의 태봉산도 이 무렵 벌판에 서서 보면 한달음처럼 가까웠다. 주위에 눈길을 가둘 무엇 하나 없던 까닭에 먼 산도 콧날처럼 지척이었다.
그렇다고 너른 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사철 들녘은 춤추는 벼와 보리로 생기가 넘쳤고 그 생기의 근원은 고기비늘처럼 빛나는 그 위쪽 호수였다. 그리고 그 호수는 1779년 그 주변을 거닐었던 한 젊은이에게 준 느낌처럼 장대했다. 젊은이는 그때의 소회를 이렇게 시에 담았다.
<둑길에는 온갖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역참의 누각 가까이엔 꽃이 만개한 호수가 있네/ 얼굴에 비치는 봄물은 아득히 깊고/ 저녁구름은 두둥실 한가롭기만 하네/ 대숲이 무성해 말을 몰기는 여의치 않으나/ 연꽃이 만발해 뱃놀이 하기엔 제격일세/ 오호라, 관개(灌漑)의 힘이여/ 드넓은 호수에 물이 가득 넘실거리네>
이 시의 지은이는 정약용(丁若鏞). 우리가 잘 아는 실학자 그 사람이다. 그 무렵 화순현감으로 와 있던 부친 때문에 그는 몇 차례 남도 땅을 밟았고 그 여정에서 이 호수를 봤다. 여하튼 정약용에게 기백 넘치는 영감을 준 그 호수는 근처 역참의 이름을 따서 경양호라 불렀고 그 수면은 동문 밖 하늘을 모두 담을 만큼 넓었다.
호수 아랫녘 벌판에 민복(民福)을 가져다 줄 요량으로 생겨난
물론 그 넓이의 장대함은 정약용만 느낀 게 아니었다. 정약용의 동시대 사람인 이학규(李學逵)는 그 넓이에 대해 “흘깃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했고 경상도 상주 사람인 유주목(柳疇睦)은 “벽골제는 호남에서 가장 크다 하고 검호(檢湖)는 문경새재 이남에서 가장 크다 하나 경양방죽은 그 웅장함에 있어 결코 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 장대한 호수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것은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로 굴착했으니 어떤 이는 그 시기를 고려 때라 하고 어떤 이는 조선 초엽의 일이라 한다. 하지만 고려 때든 조선 때든 경양호가 호수 아랫녘 벌판에 민복(民福)을 가져다 줄 요량으로 생겨난 것임은 분명했다.
이렇게 생겨난 호수는 농사만 풍요롭게 하진 않았다. 봄이면 또 다른 장관이 수면 위에 펼쳐졌으니 화사한 연꽃이 온 호수를 가득 수놓았다. 그 광경에 대해 많은 이들이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놨는데 서울 사람 오횡묵(吳宖默)은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수많은 연꽃 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살포시 미풍이 불면 연분홍 꽃향기가 부드럽게 퍼진다”고 했다. 경양호는 장대함과 부드러움을 두루 품은 호수였던 것이다.
이런 장관을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 굽어보면 더욱 근사했을 것이다. 마침 호수 근처엔 제법 높다란 언덕이 있었는데 지금의 광주고등학교와 계림초등학교가 들어선 그곳이었다. 이 언덕에 1800년대 초엽 호수의 별칭을 따서 경호정(鏡湖亭)이라 이름붙인 정자가 세워졌고 그 후 1840년대에 정자를 고쳐 다시 지을 때 이름을 바꿔 응향정(凝香亭)이라 했다. 호수의 연꽃뿐 아니라 그 향기까지 탐하고자 했던 바람을 담은 이름이었다.
연꽃 말고도 호수에는 다른 장관이 더 있었다. 전라도 흥덕 사람 황윤석(黃胤錫)이 아랫녘 벌판과 윗녘 호수를 딱 반분한다고 했던 경양호의 둑길은 단순한 흙길이 아니었다. 둑길은 빼곡히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정약용은 대숲이라 했고 황윤석은 버드나무숲이라했다. 그러나 수종이 뭐든 말 몰기 여의치 않고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했던 건 분명했다. 그리고 19세기 말 이곳을 지나간 오횡묵의 표현대로라면 이런 “긴 숲길은 10여 리나 이어져 경양역까지 닿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문 밖 유림숲과 함께 이 둑길을 광주의 2대 숲길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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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호에서의 뱃놀이(1946년으로 추정됨). 경양호의 뱃놀이는 호수의 부분 매립과 풍경의 상업적 이용이라는 시대의 자궁에서 태어났다. |
끝없는 식탐으로 팽창해 나가는 도시의 속성에 매립되고
그것뿐이랴. 넉넉한 경양호는 마음의 풍요도 선사했다. 1620년대 어느 늦가을, 경양호에서 열린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나서 성내(城內)로 돌아오는 길에 지은 조희일(趙希逸)의 시는 이랬다.
<서리 맞아 무성한 잎이 모두 떨어져 가지는 앙상한데/ 이곳 남녘은 따뜻해 계절은 더디게 가네/ 늙은이 할 일없이 나이만 먹는다고 탓하지 마소/ 벗을 생각하면 반가움에 눈이 번쩍 트인다네/ 저녁연기 피어오르니 갈까마귀는 성첩(城堞)으로 날아들고/ 해 기우니 멀리 날아간 기러기도 되돌아오는데/ 길을 막고 웃는 여자아이들 개의치 마소/ 술 취해 갓을 우스꽝스럽게 쓴 것은 달이 너무 밝은 탓일 뿐이니>
이렇듯 경양호는 하늘을 품고 삶을 담았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지금 용(龍)의 고기 맛을 논하는 것처럼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엽 호수를 품은 도시엔 인구가 넘쳐났고 그러자 호수의 7할을 메워 택지로 바꿨다. 그 시절 반대도 많았지만, 아니 그 반대 덕분에 호수의 3할은 남았다. 그리고 이 남은 호수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던 중 봄부터 가을까지는 작은 배를 띄워 보트장으로 쓰고 겨울엔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훗날 추억거리로 남게 될 경양호의 뱃놀이는 이처럼 호수의 부분 매립과 풍경의 상업적 이용이라는 시대의 자궁에서 태어났던 셈이다.
그렇다면 가까스로 남은 호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풍경은 언뜻 호젓하면서도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거개는 사람들의 손과 숨결 속에 갇혀 있을 때가 많다. 경양방죽도 그랬으니 끝없는 식탐으로 팽창해 나가는 도시와 너무 가까이 있었던 탓에 오히려 더 많은 시련을 겪었다.
1960년대 말엽에서 1970년대 초엽 사이, 결국 남아 있던 호수마저 모두 매립됐다. 매립의 이유는 1930년대와 얼추 비슷했다. 인구는 더욱 늘고 택지는 더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와 다른 건 그 때는 매립 반대가 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매립에 필요한 흙을 옛 경호정가에 서 있던 언덕의 일부와 멀리 태봉산을 허물어 실어왔을 때도 반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고 한다.
거울처럼 맑다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했던 이 호수는 단지 옛적 달과 구름만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경양방죽은 시대를 달리하여 사람들의 세월과 기억까지도 담아 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얼마만큼 풍경에 깊은 상처를 주었고, 얼마만큼 풍경에 목말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200여 년 전, 정약용의 벗이자 서울 사람이었던 이학규의 시 한 편으로 그런 목마름을 대신한다.
<광주성 동쪽에 벽옥 같은 호수가 있어/ 물길이 비스듬히 거울 같은 호수 속으로 들어가네/ 촌로는 모래 밟으며 그물질을 하는데/ 나그네는 돌에 기대어 거룻배 오가는 걸 지켜보네/ 새봄 물결 속에 용과 자라 보이는 듯하고/ 날이 저물면 연꽃 사이로 바람이 이는 듯한데/ 남쪽에 오니 물색(物色)은 더욱 고우나/ 떠도는 이내 신세는 회포만 깊어가네>
글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사>
출처: 전라도닷컴 http://jeonlado.com/v3/detail.php?number=12423&thread=23r01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