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木=休
큰나무에 기대는 마음

 

2014년02월05일 15시40분
김세진 기자 

 

 

1970년대 초까지 마을숲이 잘 조성된 동네의 사람들은 마을 바깥으로 출타할 때 “숲밖에 간다”란 말들을 하셨다고 한다. 어린시절 외할머님과 어머님은 이모님이 사시던 남평 동네에 갈 적이면 늘 “숲안에 갔다 오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의 맛을 평생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마을숲은 유년시절의 가장 멋들어진 놀이터였다. 동무들과 매미잡고 사슴벌레 잡고 술래잡기 하면서 뛰어놀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페스탈로치는 “어린이를 자연에서 가르치라”고 하였다. “자연쪽이 자네보다 더 위의 교사이므로 만일 새들의 지저귐이 아이의 주의를 끌거나 진기한 벌레가 나뭇잎 위에서 기어 다닐 때엔 설령 말 연습을 하던 도중에라도 그것을 중지해야 해. 새와 벌레 쪽이 더 많은 것들을 어린이에게 더 잘 가르쳐주니까 말이야.”
네 살짜리 아들 야곱을 키우면서 그가 쓴 육아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린이들이 교사보다 자연에게서 배울 수 있도록 하라. 나무와 새와 곤충이 그들의 진정한 교사가 되게 하라”는 이 위대한 교육자의 말씀을 일찌감치 실행한 것은 우리네 조상님들이었다.

 

광주 명도동 명곡마을에는 마을의 자랑인 200년생 팽나무가 우람한 풍채로 서 있다.

 

 

마을의 수호목으로

 

마을이 있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당산나무로 대표되는 마을의 노거수들은 하늘과 지상을 이어주는 마을의 영목으로, 마을사람들의 애환을 함께 나누면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권선징악의 수호목으로, 허약한 마을의 기를 살려주는 풍수목으로, 풍수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주는 방재목으로, 아들딸을 점지해주고 벼슬길을 열어주는 기원목으로 존재해 왔다.
또한 마을의 노거수는 시원한 그늘로 대화의 장을 만들어 주었다. ‘쉴 휴(休)’자의 생김새가 ‘人+木’인 것처럼, 마을사람들은 나무에 기대어 휴식을 얻고 공동체를 사는 지혜를 얻었다. 마을 나무는 전설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 사람들의 정서를 살찌게 했고, 장엄하고 변화무쌍한 자태로 풍광을 아름답게 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노거수를 위해 해마다 정성을 들여 술과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금줄로 감싸 보호해 주었으며, 때로는 밑둥치를 씻겨주고 종종 막걸리와 거름을 부어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광주 광산구 명도동에는 나주 오씨 집성촌인 명곡(明谷)마을이 있다. 멀리서 보면 그곳에 마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마을을 가리고 있는 것은 ‘길다란 초록의 띠’, 짙푸른 소나무숲이다.
“동네를 가려 놓아야 좋다고 조상님들이 마을 입구에 심었다고 그래.”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논과 논 사이에 둔덕을 마련하여 소나무를 울창하게 심은 것을 보면, 비보 수림의 용도였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무성하였을 마을숲은 지금은 경운기 이동에 걸리적 거린다는 이유로 베어지고, 혹은 거센 비바람에 쓰러져 듬성듬성 한 구석이 보인다. 마을 안쪽엔 명곡마을의 자랑인 200년생 팽나무가 우람한 풍채로 서 있다. 나주 오씨들이 조선시대 중엽에 이 곳에 정착하면서 심었다는 나무다.
“언젠가 동네 훤하라고 나무 몇 그루를 베었는디 남자들이 많이 상했다고 그런 얘기도 들었어. 그 옆 팽나무가 비 때문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하면 동네에 꼭 안 좋은 일이 생겨.”
그렇듯 나뭇가지 하나 함부로 다치지 않게 삼가는 마음들로 함께 살기를 도모하였던 옛사람들의 지극정성으로 큰 나무들은 수호목의 자리를 당당하게 지켜냈다.

 

 

수령 600년의 광주 칠석동 은행나무. 마을을 지키는 서낭나무다. 이 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가 광주지역을 대표하는 칠석고싸움놀이다.

 

 

마을문화의 중심공간으로

 

마을 뒤 죽령산에 옻돌이라 부르는 까만돌이 많아 칠석(漆石)이라 부른 광주 남구 칠석동. 그 모습이 소가 앉아 있는 형상인데 소가 움직이면 마을의 기가 빠져나간다고 소머리 앞에 구유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소머리 위에는 소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삐를 매놓는 나무를 심었다.
그 키가 25m에 달하며 가슴높이둘레(흉고)가 7m에 가까운 수령 600년의 칠석동 은행나무(광주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0호)는 마을을 지키는 서낭나무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이면 할머니당산으로 모시는 이 나무와 뒷산 할아버지당산나무에 성대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가 광주지역을 대표하는 칠석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다. 고싸움놀이는 정월 대보름 전후에 전라남도 지역에서 행해지는 격렬한 남성성을 나타내는 집단놀이로 당산제가 끝나면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나누어 용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 주민들의 대동단결심이 이듬해 농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마을의 거센 가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풍수적인 의미가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부용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이 자리해 있어 마을문화의 터전으로서 의미를 더한다. 부용정을 세운 김문발은 여기서 지방자치의 기초가 되는 향약을 가장 먼저 시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공자가 항시 제자들과 그 아래서 글을 읽고 학문을 가르쳤기에 행단(杏壇)이라 불리는 은행나무. 우리나라에서 공자를 모시는 향교에 은행나무를 반드시 심었던 이유다. 열매가 손자 대에 가서야 열린다고 공손수(公孫樹)라 불리는 것은 그렇게 더딘 성장을 지켜보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부로 베면 재앙을 당한다는 속설도 따른다. 작은 나무를 키워 다음 세대에 전하려는 귀한 마음들이 거목을 길러내고 나무가 거느린 문화적 자산을 살찌운 것이다.

 

곡성 입면 내동리 이팝나무. 한창 만개한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들판에 쌓아 놓은 고봉밥처럼 보인다.

 

 

마을 사람들의 애환에 건네는 위로

 

400여 년의 삶을 살아온 나무들이 자라는 곳을 제방삼아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농사에 이용하는 현명함이 돋보인다. 광주 남구 대촌동 도금(陶琴)마을. 마을 들머리엔 입석이 있고 마을 안쪽 도금지 제방에 느티나무 네 그루(두 그루는 후대에 심음), 곰솔 다섯 그루, 이팝나무가 있다.
도금마을을 대표하는 노거수는 이팝나무이다. 광주시 보호수(82-16호)인 이팝나무는 키가 8m, 가슴높이둘레 218cm로 흉고 지름을 감안하면 약 250~300년의 수령으로 짐작된다.
광주시를 대표하는 향토 수종을 선정했을 당시 당당하게 이팝나무의 대표 어미나무(母樹)로 지정된 나무이기도 하다.
모내기철인 입하쯤에 꽃을 피우는 나무이기에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금마을에서는 이팝나무꽃이 위쪽부터 피면 모를 일찍 낸 논들이 풍년이 들고, 아래쪽부터 피면 모를 늦게 낸 논들이 풍년이 들고, 꽃들이 전체적으로 만개를 하면 모든 논들이 풍년이 든다는 말이 구전되고 있다. 어쨌든 뉘집에선가는 풍년이 든다는 기분 좋은 꽃점이다.
오뉴월에 흰 꽃이 만발할 적이면 이팝나무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한창 만개한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들판에 쌓아놓은 고봉밥처럼 보인다.
‘이팝나무’라는 말은 ‘이밥나무’가 변한 말이다. ‘이밥’은 쌀밥을 말한다. 지금이야 쌀밥을 누구나 먹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족인 이씨(李氏)들이나 양반네들이 먹는 밥이지 일반 서민은 감히 먹을 수 없는 귀한 밥이라하여 ‘이씨의 밥’, 즉 ‘이(李)밥’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가난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에는 그 귀한 이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것이 누구나의 소원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을지언정, 눈에 한가득 담는 하얀 쌀밥으로나마 나무에게서 건네받은 위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한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만히 보듬어준 큰나무. 마을의 큰나무는 항시 뽀짝 다가가 기대고 싶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니다.

 

마을이 있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예전에 마을숲이 잘 조성된 동네의 사람들은 마을 바깥으로 출타할 때 “숲밖에 간다”란 말을 쓰곤 했다. 화순 남면 내리 마을숲. 사진·박갑철 기자

 

글 김세진 <환경부 환경교육(생태) 홍보강사·숲해설가> 사진 한진수

 

 

출처: 전라도닷컴 : http://jeonlado.com/v3/detail.php?number=12696&thread=23r01r01

 

Posted by Kukul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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