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혼자 되니 말할 수 없이 외로워… 그저 꿈인 것만 같아”
ㆍ6년 만에 첫 공식 인터뷰
서울 동교동 178-9.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의 시간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8월18일에 멈춰 있다. 대문에 ‘김대중’ ‘이희호’라고 쓰인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고 응접실이나 침실엔 김 전 대통령의 손때 묻은 책들, 한가할 때 보던 비디오까지 남아있다. 같은 건물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는 김 전 대통령이 병원에 갈 때 입던 양복, 지팡이, 병상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직접 뜬 양말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서울 동교동 178-9.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의 시간은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2009년 8월18일에 멈춰 있다. 대문에 ‘김대중’ ‘이희호’라고 쓰인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고 응접실이나 침실엔 김 전 대통령의 손때 묻은 책들, 한가할 때 보던 비디오까지 남아있다. 같은 건물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는 김 전 대통령이 병원에 갈 때 입던 양복, 지팡이, 병상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직접 뜬 양말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이희호 여사가 지난 24일 서울 동교동 사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평생의 동지이자 동반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여사는 “남편은 생애 마지막날까지 민주주의와 민생문제, 남북관계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했다. 박민규기자
국장이 치러지는 동안 놀랍도록 의연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인 이희호 여사는 최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슬픔 속에서도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여사는 지난 2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편이 추구해온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빛 바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여사가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한 것은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는 물론 2003년 청와대를 떠난 뒤로도 처음이다. 남편이 세상을 뜬 지 넉 달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인터뷰는 유인경 선임기자가 진행했다.
- 근황은 어떠십니까.
“혼자 되니 말할 수 없이 외롭지요. 사람들이 아무리 옆에 있어줘도 마음이 텅 빈 듯합니다. 매주 두 차례 현충원(김 전 대통령 묘소)을 찾아가지만 그저 꿈인 것만 같아요. 지난달에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남편의 추도회에 다녀왔는데 많은 분들이 참석해줘 무척 고마웠습니다. 찾아오시는 손님들 만나고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 라모스 호르타 동티모르 대통령, 아이린 칸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등도 만났습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신앙심 덕분에 건강은 괜찮은 편입니다.”
-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김대중평화센터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세계평화, 빈곤퇴치를 목적으로 남편이 세운 기관입니다. 그동안 6·15 남북공동선언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강연회와 학술행사를 해왔습니다. 센터가 그동안 해온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사업을 계속하면서 빈곤퇴치 분야의 일도 해볼 생각입니다. 소외되고 어렵게 사는 분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 몇 달 전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만나셨지요.
“지난 10월21일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권 여사를 만나 위로했습니다. 권 여사는 애통함이 저보다 더 클 텐데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고 노 전 대통령의 묘지 주변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이 컸습니다. 묘지 주변 정리가 아직 잘돼 있지 않던데, 국민들도 그렇고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심경을 듣고 싶습니다.
“37일간 병원에 계실 때가 힘들었습니다. 남편이 처음 입원했을 때는 가벼운 폐렴 증상이라 곧 훌훌 털고 일어나실 줄로 믿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통증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약을 써서 수면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에 대화도 나눌 수 없었지요. 차가운 남편 손발에 장갑과 양말을 짜서 끼워드리는 일밖에 못했습니다. 제가 무력하게 느껴졌지만,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마지막 떠나시는 길을 잘 보내드리고 싶었지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날마다 남편이 제 손 잡고 기도했어요 이 나라가 잘되게 도와달라고…”
- 내외분은 부부애가 남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거하기 전 각별히 기억할 만한 추억이 있는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에 남편은 충격이 컸습니다.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 때 햇볕 아래서 두 시간 가까이 참석하신 뒤부터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그 이후엔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침대에 걸터앉아 제 손을 붙잡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생경제, 남북관계가 모두 위기입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나라가 잘되게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하고요.”
- 주변 분들 이야기로는 내외가 함께 노래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6년 가까이 1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던 때, 같이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지요.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뒤 거실에서 창문을 통해 꽃과 나무, 새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것도 기억나고요. 남편이 자주 농담을 해서 많이 웃기도 했고…. 가끔씩 침대에 걸터앉아 함께 ‘고향의 봄’이나 ‘사랑으로’ 같은 노래도 불렀어요. (비서관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걸) 끝까지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웃음).”
- 미국 유학을 한 전문직 여성이 홀아비에 직업도 없던 남성과 결혼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첫 만남은 6·25 당시 부산에 피란갔을 때였어요. 이화여고생들이 연합동지회란 모임을 만들었는데 졸업 후 동문 외에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입회시키자고 했습니다. 남성 회원도 받았는데 그때 남편이 참여한 거죠. 전 환도 후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는데, 명동거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어요. 다방에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귀게 됐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이해심이 깊은 점이 매력적이었지요. 주변에서 반대했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 두 분은 양성평등을 실천한 부부로도 알려졌습니다. 대문에 두 분 문패를 나란히 단 것은 누구 생각이셨나요.
“전적으로 남편 생각입니다. 처음 동교동에 집을 샀을 때 남편이 문패를 함께 달더군요. 저보다 먼저 그런 생각을 해 준 남편이 고마웠습니다. 저도 여성운동을 했지만, 남편은 양성평등·여성문제에 대해 분명한 신념이 있었어요. 야당 때는 가족법 개정에 앞장섰고, 대통령 재임 중에는 여성부를 만들고 남녀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을 제정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죠. 만약 그런 의식이 없는 분이라면 해로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요.”
“간혹 내외 비자금 얘기 나오는데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상속 문제 정리해 공개할 생각”
- 김 전 대통령은 사랑받는 지도자였으면서, 많은 오해를 받은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 특히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어요. 남편은 일생동안 국가와 민족,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남북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아직도 일부에서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너무도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간혹 저희 내외의 비자금이 어떻다, 재산이 어떻다 하는 얘기도 나오는데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어이가 없습니다. 내년 초에는 상속과 관련된 문제도 정리해서 공개할 생각이에요.”
-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지난 10년간 일궈낸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갈등이 커지고 있고, 남북관계에도 긴장과 반목이 계속돼 왔습니다. 최근 신종플루 치료제 타미플루를 북한에 지원한 것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더욱 활성화됐으면 합니다.”
-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입니까.
“서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데다 그런 서민들 수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지요. 게다가 젊은이들은 자질과 능력이 있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이러한 때야말로 제 남편이 추구했던 정신과 정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와 관용, 화해와 협력, 어렵고 힘들게 사는 우리 이웃을 돌보는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죠.”
- 김 전 대통령은 항상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국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정치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남편이 남긴 정신, 즉 대화의 정치, 관용의 정치, 분배의 정치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가지고 있지요. 국민들도 각자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나라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어렵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견디다보면 꼭 (희망한 것이)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내년 6·15 선언 10주년을 기념해 남편의 자서전이 출간될 예정이어서 원고를 정리 중인데, 남편의 삶을 되돌아보니 그분의 철학과 신념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입력 : 2009-12-29 01:06:45ㅣ수정 : 2009-12-29 01: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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