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황금사리병 1천400년 만에 빛나다 | |
정확히 1천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사리를 담는 사리기를 비롯해 탑에 안장되는 각종 공양품을 일컫는 말)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금.은.동 사리 사리장엄구 일체가 한꺼번에 발견된 셈이다.
특히 청동 사리함(높이 10.3㎝)의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능산리사(567년 축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 축조양식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금.은.동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발굴성과"라고 평가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한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픔, 관모장식을 비롯해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 사찰의 석축과 연결된 20m 가량은 경사졌으며 그 아래쪽부터는 평탄하게 조성됐다.
이밖에 동서방향의 석축부위에서 백제시대 평기와가 다량 출토됐다. 연화문수막새(蓮華紋圓瓦堂), 연목와(椽木瓦) 등이 다수 출토됐으며 소조 광배(光背)로 보이는 토제품 2점도 함께 발견됐다. 김승욱 기자 kind3@yna.co.kr (부여=연합뉴스) |
기사등록 : 2007-10-24 오후 01:12:24 기사수정 : 2007-10-24 오후 02:00:49 |
완벽한 백제의 예술혼 1400년만에 ‘빛’ 보다 | |
입력: 2007년 10월 24일 18:03:23 | |
◇금·은·동 사리기
우선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1990년대 중반 능사에서 사리석감이 왔지만 사리기는 없었다”고 전했다. 특히 석함으로 만들어진 사리공(16×12×16㎝) 안에 청동제 사리함(높이 10.3㎝)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은제 사리병(외병·6.6×4.4㎝)이, 또 그 은제 사리병 속에 받침대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금제사리병(내병·4.6×1.5㎝)이 계속 나왔다.
김과장은 “석함까지 하면 돌-청동-은-금 등이 4중으로 중첩된 완벽한 사리기의 출토”라고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사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금·은 사리병엔 맑고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과연 1400년 이상 버텨왔을지 모르는 그 액체는 무엇일까. 유홍준 청장은 “사리가 녹아 액체로 변한 것인지, 결로현상 때문에 빚어진 것인지 성분 분석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제 사리병은 순금에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 이규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원래 금의 비중값은 19인데 출토된 금제 사리병의 비중은 18”이라면서 “순금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당혹감과 연구 과제를 안겨준 ‘명문’
또 하나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는 청동제 사리함에 새긴 명문이다. 노중국 교수는 “기록이 부족한 우리 고대사 연구에 명문 발견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새겨진 명문 기록 |
명문에 나오는 ‘창(昌)’은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년)을, ‘정유년 2월’은 577년 2월을 각각 지칭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왕흥사는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됐다”고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새 명문은 왕흥사의 실제축조연대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려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또하나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일본 쇼도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말고도 577년 사망한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노교수는 “고대사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23년의 차이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원래 왕흥사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사망한 뒤 신하들에게 넘어간 권력을 되찾기 위해, 즉 왕권의 흥륭을 위해 창건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는 것.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그러나 이번 명문 발견으로 왕흥사는 위덕왕이 왕권쟁취 등의 목적이 아니라 죽은 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창건한 이른 원찰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노교수는 “결국 위덕왕이 능사(567년)는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해, 그리고 왕흥사는 죽은 아들을 위해 각각 지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남는 수수께끼는 명문에 따르면 사리병에 넣은 2매의 사리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는 점. 유청장은 “사리기와 사리병을 열 때 쉽게 열리지 않았을 정도로 도굴 흔적은 없었다”면서 “사리가 물로 변했는지, 혹은 처음부터 넣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진단구 및 어도
전문가들은 진단구(탑, 건물을 지을 때 붕괴방지와 액막이용으로 넣는 장신구 등 생활용구)의 화려함에 넋을 잃었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출토됐다.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곡옥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 옥류,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이 보였다. 또한 철도자(칼), 운모로 만든 연꽃은 물론, 중국 남북조시대인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된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들이 확인됐다.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절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왕흥사의 축조 연대가 서기 577년임을 말해준다. |
강순형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장은 “특히 1㎜도 되지 않게 깎아 투명한 운모로 연꽃 모양을 만들어 사이사이에 금박을 입힌 형태는 처음 확인되며, 그 수법이 너무도 정교하다”고 감탄했다. 또한 화석화한 목탄에 금을 두른 탄목금구는 무령왕릉 출토품과 같다. 유리와 옥을 직경 5㎜도 되지 않은 알갱이로 만든 목걸이, 팔찌 등과 호랑이를 형상화한 목걸이 등은 걸작 중 걸작으로 꼽힌다. 대부분은 실생활에 사용된 것들을 그대로 묻었다.
왕흥사지 심초석 남쪽에서 출토된 진단구들 |
유홍준 청장은 “당대 중국은 수나라 통일(589년) 전의 북제·북주시대인 과도기였고, 유럽은 중세 이전의 암흑시기였다”면서 “따라서 이번 유물들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라고 단언했다. 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왕이 백마강을 통해 행차, 배를 대고 왕흥사에 들어온 것을 알려주는 어도(御道·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도 확인됐다.
〈부여|이기환 선임기자〉
출처: 경향신문(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241803231&code=960201)
백제 황금사리병 1천400년 만에 빛나다 학계 "금동대향로 발견 이래 최대 성과" 정확히 1천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554-598)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 목탑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황금 사리병을 담은 청동 사리함의 몸체에는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다. 백제 창왕 재위기간 중 정유년은 577년이다.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창왕 13년(567년)' 명문이 새겨진 석제 사리외감(舍利外龕. 옆으로 집어넣는 방식의 사리안치용 상자)이 발견된 적은 있으나 사리외감 속의 사리병은 도굴된 뒤였다.
즉,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황금 사리병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사리병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인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백제 사리병이 출현했음을 뜻한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청동사리함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 하단에 마련된 사리안치용 석제의 한쪽 끝에 뚫린 사리공에 봉안돼 있었다.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7.9㎝)은 발굴 당시 꽃봉오리 모양의 뚜껑꼭지가 떨어져 내부에 흙탕물이 차 있는 상태였다. 사리함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능산리사(567년 축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 축조양식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은제사리외병은 높이 6.8㎝, 지름 4.4㎝의 크기로 뚜껑에 연화문이 장식돼 있다. 내부에 황금사리내병을 안치하기 위한 받침대가 마련돼 있으며 청동사리함과는 달리 맑은 물이 차 있었다.
금제사리내병은 높이 4.6㎝, 지름 1.5㎝로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한 채 발견됐다. 그러나 청동사리함의 몸체에 적힌 기록과는 달리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번 황금 사리병의 발굴에 대해 백제사 전공자 등 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의 고도에서 발굴한 최대의 성과"라고 했으며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 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백제 사리장치 발견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금, 은, 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점 등에서 이번 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특히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고 사리함을 안치하는 방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백제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소화한 형태"라고 강조했다.
중국에서는 심초석 밑에 전실 등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사리장치를 안치했다. 왕흥사 목탑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는 대신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아 사리장치를 안치하면서도 심초석이 받는 하중을 나누어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 청동 사리함 몸체에 새겨진 '사리이매장시 신화위삼(舍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사리 두 매를 묻었으나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이라는 글귀는 사리를 안치할 때 신묘한 이야기를 적는 전형적인 사리안치 기록의 형태를 보여준다.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은 사리병의 형태를 통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어깨가 과장되고 구연부(아가리 부위)가 예리한 은제 사리외병의 형태는 전형적인 중국 남북조시대 도자기의 모습이라는 것.
또 "청동외함에 새겨진 명문은 무령왕릉의 글씨체와 비슷하며 당시 예서체의 흔적으로 보인다"며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사리장치 주위에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8천 여 개의 구슬을 비롯해 목걸이,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픔, 관모장식을 비롯해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에서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계명대 노중국 교수는 상평오수전과 관련해 "백제는 창왕의 선왕인 성왕 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남조와 주로 교류를 가졌으나 창왕 대에 이르러 북조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를 확대했다"며 "북조의 오수전은 백제의 외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 사찰의 석축과 연결된 20m 가량은 경사졌으며 그 아래쪽부터는 평탄하게 조성됐다.
이 어도는 '35년(634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됐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는 삼국사기 백제 무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왕이 백마강을 따라 왕흥사에 도착한 뒤 배를 대고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동서방향의 석축부위에서 백제시대 평기와가 다량 출토됐다. 연화문수막새(蓮華紋圓瓦堂), 연목와(椽木瓦) 등이 다수 출토됐으며 소조 광배(光背)로 보이는 토제품 2점도 함께 발견됐다.
/부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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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포츠 투데이(http://www.stoo.com/news/html/000/798/2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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