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 639년 백제 왕후가 창건
‘무왕 왕후=선화공주’ 설화 ‘흔들’
석탑서 금제사리기·사리봉안기 발견
연합
창건 시기와 내력이 설화성 짙은 기록으로만 전하는 전북 익산 미륵사가 설화처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그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설화에서는 무왕과 그 왕비인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善花)가 같이 사찰을 중건했다고 했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백제 당시 기록에서는 그 왕비가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의 딸이라는 구절이 발견돼 주목된다.

나아가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나타났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백제 사리장엄구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품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발견이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567년)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이 발굴됐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이 중 미륵사 석탑 자체는 물론이고 미륵사라는 사찰 창건 내력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인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적었다.

아직 완전한 판독과 해석이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백제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나아가 이 기록에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됐다. 이 구절은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를 백제 무왕과 그의 왕비로,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라고 기록했다.

연구소는 이 금판이 발굴됨으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고, 아울러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 사리호는 사리공 중앙에서 발견됐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다. X선 내부 투시 결과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된 데다 가공수법 또한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이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출처: 한겨레신문(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051.html)


백제 기술의 결집체 미륵사

신화에 가려진 창건의 베일 벗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아내가 세운 절로 밝혀진 익산 미륵사는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당초 이 절은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빼어난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제30대 무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모름지기 여기(용화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왕비의 청원을 받아들여 절 건축을 시작한다.

"무왕이 이 자리(용화산)에 미륵삼존의 상(象)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지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또 신라의 왕인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러나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따르면 왕비는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백제 최대의 탑인 미륵사 석탑은 신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공산도 커졌다. 탑을 지은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닐 가능성이 클 뿐더러 당시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륵사 공사는 현재 남아있는 절터 크기만 1천338만4천699㎡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절 안에 세워진 석탑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며 국보 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밖에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된 바 있다.

또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돼 있는 등 미륵사는 삼국시대 말기의 건축 기술이 총망라돼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번에 발견된 사리호 표면에서는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가 보수.해체 과정과 유물 연구를 통해 그간 신화 속에 가려진 미륵사 창건의 베일을 벗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라는 설화는 전설로만 남게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되고 있다.

buff27@yna.co.kr

출처: 연합뉴스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b%af%b8%eb%a5%b5%ec%82%ac%ec%a7%80&contents_id=AKR20090119034700005)


사리 공양 참가 백제관리 첫 확인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유물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송광호 기자 = 백제시절 왕이 주도하는 사리 공양에는 몇급 관리까지 참여했을까.

백제의 4급 관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유물이 국내에서 첫 발견됐다.이는 사리 공양에 참가하는 백제 관리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의 유물 사진 중 금제소형판을 분석한 결과, 명문에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19일 밝혔다. 이 교수는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다"며 "이를 통해 관료 중에서 4급 인물이 사리 공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백제의 사리공양과 관련한 유물은 지금까지 지난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창왕(위덕왕) 시대(567년) 석제(石製)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사리장엄구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지만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교수는 "금이란 당시의 화폐이자 가장 중요한 패물"이라며 "금 크기도 상당히 큰 점에 비춰 4급 관리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입증하는 단서"라고 덧붙였다.그는 또 "최소한 4급까지는 법회에 참가해 공양을 했음을 방증하는 증거"라며 "하지만 5,6급이 공양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출토된 은제관식 2개를 분석하면서 "한 개는 매우 정교하게 세공돼 있고, 다른 하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점에 비춰, 1,2,3급이 착용하는 은제관식과 4,5,6급이 차는 은제관식으로 나눠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 주서(周書)에는 백제 16개 관리 등급 중 6등급까지는 머리에 은제관식을 꽂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출처: 연합뉴스(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Article.aspx?searchpart=article&searchtext=%eb%af%b8%eb%a5%b5%ec%82%ac%ec%a7%80&contents_id=AKR20090119105800005)


<익산 미륵사지석탑서 백제 사리장엄 발견>



(서울=연합뉴스) 장성구 기자 =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西塔)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탑 창건 내력을 밝혀주는 금제(金製) 사리기(舍利器)를 비롯한 중요 유물들이 확인됐다.
sunggu@yna.co.kr


< 미륵사지석탑 해체과정 >

(서울=연합뉴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에서 심주(心柱)를 해체하는 광경. 2009.1.19 << 문화재청 >>

< 사리장엄 >

(서울=연합뉴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리장엄. 사리장엄은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2009.1.19 << 문화재청 >>

< 금제사리호 >

(서울=연합뉴스)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있던 금제사리호.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는데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9.1.19 << 문화재청 >>

< 백제의 은제관식 >

(서울=연합뉴스)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銀製冠飾) 및 금제소평판 유물.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로 백제의 세밀한 기술을 엿볼 수 있다고 19일 말했다. 2009.1.19 << 문화재청 제공 >>

< 금제 사리 봉안기 >

(서울=연합뉴스) 미륵사지 석탑의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를 토대로 베일에 쌓인 미륵사지의 조성연대를 밝힐 수 있었다고 19일 말했다. 2009.1.19 << 문화재청 제공 >>


출처: 연합뉴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1/19/0200000000AKR20090119021400005.HTML)


< (표) 미륵사지 석탑서 나온 유물 목록 >
재질 유물명 크기(㎝) 수량 비고









금속제품
금제사리호 7.7×13 1 내함+외함
금제사리봉안기 15.3×10.3 1 기해년(639
년)
금제족집게 0.8×5 1
금제소형판 1.5×8.6 18 사주자명문
금괴 1.3×2.5 4
금제귀걸이 1.5 1
도자 2.2×18 7
은제관식 4.8×13.4 2
은제과대장식 2×13.4 2
원형합 4.3×8 6
청동고리 1.2×2 1

유리 및 옥제품
유리판 23×23 1
호박, 유리구
슬, 옥구슬 등
3×2.5 460
기타 직물, 금사 등 일괄
(자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출처: 연합뉴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1/19/0200000000AKR20090119190300005.HTML)


@ 참고 : 연합뉴스 미륵사지 관련 기사(http://app.yonhapnews.co.kr/YNA/Basic/article/search/YIBW_showSearchTotalList.aspx?searchpart=total&searchtext=%uBBF8%uB975%uC0AC%uC9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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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 추가 :


미륵사, 선화공주와 무관하다

익산 | 이기환기자

ㆍ“백제 무왕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창건”
ㆍ석탑서 명문 발견 … 서동요 설화 재검토 필요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전북 익산 미륵사(국보 10호)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딸이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그 연대는 639년으로 밝혀졌다. 이는 1971년 무령왕릉, 93년 능산리 백제금동향로, 2003년 공주 수촌리 발굴에 이은 백제지역 최대의 역사적인 발굴로 평가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지난 14일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확인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특히 금제 사리봉안기에서는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기해년(939)에 절을 창건했다”는 요지의 명문이 발견됐다.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자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년)의 왕후인 선화공주가 미륵삼존불을 만나 무왕에게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여 미륵사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하지만 명문 내용을 보면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최고 관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음이 확인됐다”면서 “미륵사는 바로 왕후가 남편(무왕)의 강녕수복을 위해 지은 절”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연애와 결혼, 미륵사의 창건 등을 흥미롭게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설화 내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사리공에서는 사리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제 사리봉안기와 은제 사리합(舍利盒) 등 6점, 장식용 칼로 보이는 단도 2점,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점이 수습됐다.

미륵사 창건 내력을 밝혀준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이다. 김봉건 소장은 “이로써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 연대 등이 정확하게 드러났다”며 “문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 이 시대 백제의 서체(書體)를 연구하는 데도 커다란 획을 긋게 됐다”고 말했다.

<익산 | 이기환기자>

익산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ㆍ미륵사지 ‘금제사리기’ 명문

미륵사 창건 목적·연대 등 가늠 ‘획기적 발굴’
이두 안보여… 무왕의 부인이 세운 절 뒷받침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따님이 세운 절이다.”

19일 공개된 미륵사지 출토 금제사리기 명문은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건립연대, 그리고 당대의 글씨체 등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명문내용 상 가장 확실한 것은 이 미륵사지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백제 무왕(서동왕자·재위 600~641년)과 사랑을 나누고 훗날 왕후가 된 선화공주가 세운 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무왕의 부인(선화공주)이 용화산 큰 못에 나타난 미륵삼존을 보고는 왕에게 ‘이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여 미륵사를 지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명문을 보면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 백제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인 종선(種善)으로~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좌평은 백제 16관등(官等) 중 제1품이다. 이로써 이 절은 기해년, 즉 639년 백제 무왕의 왕후이자 백제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 세운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택(沙宅)은 당대 백제 8대 성(姓) 가운데 하나이다.

미륵사를 창건한 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명문이 나옴에 따라 삼국유사에 나온 서동왕자(무왕)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의 결혼설화가 후대의 가공설화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이번에 나온 명문 가운데 가장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은 명문에 나온 ‘법왕(法王)’이다. 법왕(재위 599~600년)은 실제인물로 무왕의 아버지로 단 2년간 재위했다. 따라서 명문에 나오는 법왕이 바로 이 무왕의 아버지를 뜻한다면 미륵사는 법왕의 왕후가 세운 절이 된다. 하지만 명문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법왕이라는 말은 법문(法門)의 왕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로 해석됐다.

또 하나 판독에 엇갈리는 대목은 ‘아백제왕후좌평사택적덕여종선인(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種善因)’이라는 대목이다.

명문을 해독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로 해석했다. 하지만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이것을 좌평사택적덕녀종선인(佐平沙宅積德女種善因)에서 종선은 사람의 이름인 종선(種善)일 수도 있다”면서 “따라서 미륵사지를 세운 무왕의 부인(왕후) 이름이 종선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았다.

명문의 서체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손환일 교수는 “6세기까지 유행하던 북주(557~581년)서체가 7세기에 들면 남조(420~589년)로 바뀌는 게 일반적이었다”면서 “그러나 이 명문의 서체는 유행이 지난 북주체이며, 무엇보다 이두(吏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금판(金板)을 이용해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로 썼다는 것. 손 교수는 “서단(書丹)이라고 하는 이런 고급기법은 지금까지 고려시대부터 유행한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이번 명문에서 처음 확인된 이 ‘서단’이 7세기 초반에 이미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그는 또 “유행이 지난 남조체를 쓰고, 일상생활에 쓰이는 이두가 보이지 않으며, 서단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즉, 이런 사리장엄이라든가, 큰스님(大師)들의 비문 등 공식적이고 예를 갖추는 글에는 이두를 쓰지 않고 고체(古體)를 썼다. 이두를 쓴 생활문과는 격이 다르게 취급했다는 뜻”이라며 “명문을 검토하면 이 미륵사지는 무왕의 강녕수복을 위해 무왕의 왕후가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

또한 이번에 명문 사리장엄구와 함께 출토된 유물일괄도 백제 공예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연구소 측은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 그리고 일괄로 출토된 공양품들의 정교하고 세련된 공예기법 등을 감안하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드러나고, 은제관식을 비롯한 공양품들이 다량으로 확인됨으로써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됐다”면서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익산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Posted by Kukul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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