共存主義/잃음과 잊음

삿된 것을 베리라 - 장도(粧刀)

Kukulcan 2016. 3. 6. 20:33

삿된 것을 베리라
광양 장도박물관 박종군 | 스크랩하기 |
2016년02월11일 16시15분
남인희(namu@jeonlado.com) 기자

금은장매조문갖은을자도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미쳐서(狂) 미칠(及) 수 있었던 사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아무도 알아 줄 기약도 없는 막막함 속에서 가야 할 길을 간 사람. 그 길을 다시 그의 아들이 따르고 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칼을 만드는 사람, 칼밖에 모르는 사람. 최고의 칼을 만드는 것이 꿈인 사람 박종군 장도장.

“지조를 지키는 데 남녀가 유별하랴”
외출하기 앞서 핸드폰을 챙기는 대신 칼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다. 허리춤이나 옷고름에 찬다고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닌다고 낭도(囊刀)라고 불리기도 했던 장도.
장도(粧刀)란 칼집이 있는 한 뼘(10〜15cm) 내외 작은 칼이다.
흔히 장도 하면 여인의 은장도를 떠올린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드라마 속에서 이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소품이 은장도.
“장도가 상투적인 장면에 반복노출되면서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고 말하는 광양장도박물관장 박종군(53)씨.
“조선시대 장도는 남녀 모두 지니고 다니던 장식적인 장신구였다. 지조를 지키는 데 남녀가 유별할 리 없다. 장도는 시집가는 딸에게 주던 혼례필수품이었고, 관례(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선물하던 칼이었다.”
‘釼曾當百萬師’(작은 칼이라도 일찍이 100만의 군사를 상대한다).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의병장 김성일의 패도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는 서슬 퍼런 의지가 담겨 있다. 을사늑약에 강경하게 반대하던 충정공 민영환은 한복 두루마기에 대님도 매지 않은 석고대죄의 차림으로 조약반대를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끝에 장도로 자결했다. 소송 정재건(곡성 입면 약천리)은 1910년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목욕재계하고 문을 잠근 후 장도로 목숨을 끊었다. ‘왜놈 세상에서 왜놈 학교에 다니지도 말라’는 유훈을 남겨 후손들은 일경의 감시 속에 해방에 이르기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강해지려면 한사코 뜨거운 불속으로 자주 들어가야 한다.
 
메질로 단련시키는 쇠. 맞을수록 불순한 것이 빠져나간다.
‘일편심’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장도에 올릴 국화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나는 오직 칼밖에 모른다”
칼날에 ‘일편심(一片心)’을 새기는 장도에 대한 탄압이 유독 거셌던 일제강점기, 일본은 전쟁 준비에 광분하여 철을 재료로 하는 장도 생산을 일절 금지했다. 광양 살던 장익성(작고)은 순사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기를 거듭하면서도 고집스레 장도를 만들었다. ‘패도집’ 할아버지 장익성과 소년 박용기의 만남이 광양 장도의 맥을 오늘에 이어지게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용기(1931∼2013) 선생은 열네 살에 장도에 입문했다. 세 살이 돼서야 처음 제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던 병약한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공작시간을 그리 좋아했다. 만들기 성적만은 늘 ‘갑(甲)’이었다. 학교만 파하면 골목 건너편에 있던 패도집으로 달음질을 쳤다.
칼 만드는 구경에 빠져 살던 아이는 중학교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했다. 반대가 극심했으나 고모들의 응원으로 좋아하는 장도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이니 ‘일’이 아니라 ‘놀이’었다. 처음에는 심부름을 시켜보다 좀 싹수가 보이면 칼 수리를 맡기는 패도집에서 소년 용기는 6개월 만에 칼을 말끔하게 수리했다. 스승이 시킨 일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점심때마다 끼니를 거르며 작업을 거듭한 결과였다.
밥보다 장도를 좋아하는 제자에게 스승은 1년이 지나자 장도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두 자루 만들면 그 대가로 한 자루를 받았다. 하나를 팔면 쌀 한 가마를 얻을 수 있었다.
허나, 연을 맺은 지 3년 만인 1948년 스승은 73세로 세상을 뜨고 그이는 공방을 얻어 독립, 이후 1966년 ‘광양패도공업사’를 열게 된다.
“나는 칼을 만드는 사람이다. 칼 밖에 모른다. 성격도 칼 같다. 인생이 칼로 이루어져 있다.”
운명이란 그 사람이 원한 것, 그의 운명은 다시 그의 아들의 숙명이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장도를 제작해 왔다.” 아버지 박용기(왼쪽) 선생이 가르친 것은 칼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장도 정신’이었다고 말하는 박종군 장도장.

가난한 ‘패도집’ 아버지가 물려준 힘
‘패도집’ 아들로 태어난 박종군(53·광양장도박물관장).
그에게 어린 시절은 무시로 대문을 열던 ‘빚쟁이’들로 기억된다. “부모님 집에 안계신데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장도가 필요없어진 시대에 장도를 놓지 않았던 남자와 혼인을 한 어머니 정정례(90) 여사. 남편은 장도 만들 욕심에 은이야 옥이야 귀금속에 ‘나무의 보석’이라는 흑단이며 먹감나무며 벼락맞은 대추나무며 몸값 나가는 재료들을 겁없이 사들였다. 끼니 이을 쌀은 없어도 장도 만들 은은 떨어지면 안되는 가장이었다.
비싼 재료를 사들이고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칼만 만들고 있으니 이 집 저 집서 돈 꾸어다 바치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밤새 장도에 쓸 매듭을 만들고 날이 새면 돈을 빌리러 다녔다.”
노상 메뚜기처럼 이 집 저 집으로 돈 꾸러 다니던 어머니가 가여웠던 소년 종군. 네 살 터울 쌍둥이 여동생과 우물물을 길어 나르던 추운 겨울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엌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두면 가난한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 같아서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렸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두고 나가면 동생들한테 김치 말고 다른 찬은 손도 못대게 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어깨가 그리 무거워 보였다.
5학년 때는 장날이면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다니면서 께끼를 팔았다. 고모집에 가서 엄마가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고 둘러대고는 그 돈으로 아이스께끼를 사서 통에 채웠다. 하나에 2원짜리 아이스께끼 백 개를 채워 장터를 돌다가 덜 팔리면 밤중까지 동네를 돌면서 께끼를 팔았다. 고사리손으로 번 푼돈을 엄마한테 갖다 줬다. 소년 종군은 여름이 좋았다. 엄마한테 돈을 벌어줄 수 있어서 여름방학을 기다렸다.
“돌아보면, 어려움을 이겨내려 애썼던 어린 내가 맘에 든다. 고통의 끝까지 가본 사람은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난한 부모였기에 이겨내는 힘을 물려주었다.”

한결같이 닳고닳아 수많은 상흔을 제 몸에 아로새긴 채 위풍당당한 도구들. 칼날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1만 번의 망치질을 한다. 총 177번의 공정을 거쳐야 장도 한 자루가 만들어진다. 작업실에 즐비한 도구들에서 장도가 만들어지는 신고간난의 역정이 헤아려진다.

칼등은 부드럽게 칼날은 강하게
장도 제작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60년대 말부터 그이의 아버지는 밤 깎는 칼, 뽕 접붙이는 칼(아접도), 뽕낫 등 농기구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고안해 한때 전국적으로 팔려나간 이 칼들의 디자인은 지금도 대한민국 철물점 어디에서나 만나 볼 수 있다 한다.
밥먹을 궁리를 해본다고 직원을 열 명까지 썼던 ‘외도’는 끝내 접어야 했다. 수금을 담당한 백부님이 돈 관리에 서툴렀다.
어머니는 변함없이 돈을 꾸러 다녔다.
‘어서 빨리 커서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소년 종군. 아버지를 스승으로 장도일을 익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통공예를 공부하도록 권했다.
2011년 박종군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粧刀匠) 보유자가 되면서 1978년 장도장 보유자로 지정된 부친 박용기 선생과 함께 아버지 살아생전 2대가 동시에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아버지의 꿈은 ‘최고의 칼을 만드는 것’이었다. 칼등은 부드러우면서 칼날이 강하고 날카로운 게 최고의 칼. 최고의 장도를 만들기 위해 무쇠를 강하게 만드는 열처리 기술을 개발했다.
“아버지는 드럼통을 오려서 접목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열처리과정을 실험한 분이다. 야산을 파서 흙속에 숯을 깔고 칼을 깔고 싸이나(청산가루)를 깔고, 그렇게 시루떡 놓듯이 쟁여놓고 스물 네시간 불을 때서 싸이나가 녹아들어가면서 철에 피막이 생기면 칼날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것을 글이 아니라 몸으로 알아냈다.”
청산가리를 사용하는 이 공법을 개발하다 약에 취해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아버지는 창의 정신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미 타인의 발자국이 난 길을 따라가기보다 미답의 새 길에 매혹되는 사람이었다.
“있는 것을 답습하지 않고 없는 것을 만드는 데 골몰하셨다. 장도에 새 전통을 세우고자 하는 열정이 많은 분이었다.”
1970년대 온 동네 집집이 연탄 때던 시절, 여수 연탄공장 사장이 아버지한테 청을 하러 왔다. 연탄을 찍는 쇳덩어리가 약해서 찍다 보면 닳아지고 기계를 멈춰야 하는 일이 잦다고 했다.
동물뼛가루, 숯가루, 양잿물, 싸이나 네 가지를 섞어서 열처리를 하고 연탄공장 사장을 불렀다. 함께 온 공장장이 연탄 찍는 쇳덩이를 놓고 강철망치로 내리쳤는데 망치가 파여버렸다. 그 사장이 입이 귀에 걸려서 지금 돈으로 천만원을 주고갔다. 빚 한 몫을 갚았다.

“장인은 사심이 없고 사욕이 없어야”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아버지가 이룬 귀한 발자취를 우러르는 아들. 아버지는 아들에게 부자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장인은 사심이 없고 사욕이 없어야 한다. 사심과 사욕에 눈이 멀면 당장 돈되는 것, 팔리는 것을 만들려고 작품을 퇴색시키고 왜곡시킨다. 새로운 작품을 전혀 시도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끝까지 장사꾼이 되기를 거부한 철없는 예술가였고 낙천적인 한량이었다. 돈을 좇지 않은 아버지 덕에 가족은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제 멋대로 살 수 있게 버팀목이 돼 준 이는 어머니였다. 이제 와서 종군씨 가족들은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기 때문에 장도 문화재가 됐다. 울 어머니가 문화재다.”
“예술가한테 결혼은 사치”라고 생각하였건만, 그 아들 또한 사치를 하였다. 사치를 누리기엔 이 길이 만만치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종군씨의 아내 정윤숙(51)씨는 낙죽으로 명인 반열에 오를 만한 솜씨를 가진 장도장 이수자. 역시 이수자인 큰아들 남중(25)씨와 전수장학생 건영(19)군이 그이의 굳건한 동지이다.
박종군씨는 자신이 만든 장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장도 낙관에 아버지의 호인 ‘도암(刀庵)’을 그대로 쓴다.
2대 도암이다. “사제지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스승의 수족이 되는 것이다. 호를 물려받는 것은 후계자임을 인정받은 것이고, 스승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 심수관가(家)가 14대째 이름을 물려내려온 것과 같은 것이다. 아들 박남중이 3대 도암이 될 것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효주,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김태희가 들고 나온 장도들이 모두 박종군 장도장의 작품이다.

마을회관 지어주고 구한 벼락맞은 대추나무
조선 시대 후대 들어 주로 치장용으로 쓰이던 장도는 그 재료의 목록이 사못 호사스럽다. 나무 재료로는 흑단, 먹감나무, 대추나무, 향나무, 대나무, 심향목 등이 사용되고 옥, 호박, 비취, 마노, 공작석 등의 보석류와 대모(玳瑁, 거북이등껍질), 우골(牛骨), 어피(魚皮, 주로 상어피) 등의 동물에서 추출한 재료들도 사용한다. 칼집과 칼자루를 만드는 데는 금 은 백동 구리 등을 쓴다.
“재료 욕심이 많은 아버지는 은도 관으로 샀다.”
은장도 만드는 사람에게 은이 떨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다.
은값이 한 돈 당 8천원까지 올라갈 때는 종군씨도 ‘이제 은장도도 끝났구나’ 하고 앞이 막막하였다. 다행히 지금 은값은 돈 당 2천원. 그이가 갖고 있는 은은 무려 70kg. 은장도 만드는 이의 관심사는 금값이 아니라 은값이다.
나무를 장만하는 데는 돈도 돈이지만 정성이 있어야만 한다. 먹감나무는 눈이 특별히 고와서 비틀리지 않게 하려면 5년 정도를 건조시킨다. 그리고는 검은 부분만을 도려내 칼집으로 만든다. 대나무를 쓰려면 생대나무를 삶아서 나무의 진을 빼고 음지에서 6개월 가량을 말려서 써야 한다.
대추나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추나무의 나무결과 색은 목공예품을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게다가 벼락 맞은 나무는 완벽하게 건조되기 때문에 최상의 재료.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인근 마을 당산 대추나무가 벼락을 맞은 사건이 있었다. 말로나 들어봤지 실제로 보기 힘든 나무인지라 목공예 장인들끼리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귀신을 쫓는다는 대추나무를 마을 수호신으로 여기던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장한테 술도 사주고 장도도 갖다 주고 해봐도 도무지 내놓을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마을 회관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베어 왔다. 그 나무로 10년 동안 장도를 만들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다.

영화 속의 장도들. ‘한효주 장도’로 불리는 은장용문비녀형장도, 김태희의 백옥금은장갖은을자도, 영화 <조선 마술사>에서 고아라가 들고 나온 은장갖은을자도.(왼쪽부터)

“많이 두들겨 맞을수록 나쁜 성분 빠져”
장도를 만들려면 맨먼저 칼을 만들어야 한다. 본디 장도의 생명은 화려한 치장보다 예리한 날에 있다.
“온 정신을 모두 쏟아야 바라는 칼의 강도가 제대로 나온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무르면 효용이 없다.”
참숯을 써서 풀무를 돌려 1400~1500도까지 열을 올린 화덕에 쇠꼬챙이를 집어넣기를 수백 번 반복한다. 달궈진 쇠를 대형 모루에 올려놓고 망치로 수천 번 담금질해 얇은 철판을 만들어 칼의 모양을 잡는다.
쇠를 너무 달구어도 덜 달구어도 안된다. 온도계 대신 달궈진 쇠의 색깔을 보고 온도를 가늠한다. 붉은 빛에서 감홍색이 되기 바로 직전에 때려야 칼날이 뭉그러질 때까지 갈고 갈아 쓸 수 있다.
“해 뜨기 전 숯불에 담금질할 때 칼의 극치를 맛본다.”
빛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해질녘이나 해뜨기 직전 열처리 작업을 하면 발갛게 달아오른 칼날의 색깔이 제대로 드러난다. 알맞게 달군 쇠를 불에서 꺼내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망치질을 해야 한다. 쇠는 금세 식어버리고 금방 단단해진다.
메질로 단련시키는 쇠. 강해지려면 한사코 뜨거운 불속으로 자주 들어가야 한다.
칼날의 형태를 잡기 위해 수백 번의 망치질을 해 불순물을 제거한다.

펜장도. 평상시에는 펜, 필요시에는 칼의 기능을 하도록 1970년대 초반 박용기 장도장이 만든 작품.

“많이 두들겨 맞을수록 쇠에 있는 나쁜 성분들이 빠진다.”
이를 다시 짚불 속에 넣고 하룻밤을 묵히면 쇠가 호박처럼 물러지는데 이때 정으로 쪼아 ‘一片心(일편심)’이라는 글자를 새긴다. 그리고 강도를 주기 위해 칼날에 된장을 발라 황토물에 넣은 다음 마지막 손질을 한다. 완성된 칼에 딱 맞는 칼집을 씌우면 한뼘 크기의 작은 칼이 완성된다.
장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칼날이 유강을 갖추는 것. 칼의 본질을 나타내되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살아야 하는 것.
칼날은 담금질하여 강하게 하고 칼등은 무르게 하며, 칼신의 모양 또한 살상의 곡선을 취하지 않고 기능이 제한된 직선으로 다듬어 낸다.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장도는 총 177번의 공정을 거친다. 칼날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1만 번의 망치질을 한다.
“게으름, 적당주의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고도의 정신력이 요구되는 만큼 한순간의 방심은 모든 일을 망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장도의 제작과정은 힘들기로 이름이 나 있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 “장도를 만드는 장도장에서 일하던 이들이 도망가 장도 제작이 어려우니 사람을 보충해 달라”는 상소가 있었을까.

◀ 섬세한 세공과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서늘한 기개를 드러내는 장도들. 오동상감장도. 금과 구리의 합금인 오동을 입히고 조각부분에 합금의 금은을 녹여서 상감하여 각종 부드러운 줄로 깎아내어 마무리한 다음 3개월 가량 썩힌 소변에 한지를 적셔 오동 부분을 감싼 뒤 24시간 후에 한지를 벗겨내면 오동의 고운 색을 띠게 된다.

은장화각갖은맞배기도 (소뿔을 가공하여 채색)
 
흑시은장환첨자도 (젓가락이 달렸다)


177번의 공정 1만 번의 망치질
그이의 작업실엔 온갖 제작도구들이 즐비하다. 금속을 녹이는 화덕, 화덕에 공기를 넣는 풀무, 장도의 장식과 부속품의 형을 잡는데 사용하는 보래, 거도, 토간, 모루, 물줄이, 쇠망치, 줄, 활비비, 받침대, 다듬목, 숫돌, 정, 가위, 집게, 칼대와 칼대 받침목, 연장칼, 대패, 국화정과 납통, 불살개, 찌구, 나무망치, 도심꼬지, 깍쇠, 길이, 납인두, 갈기, 거름쇠, 실톱 등 실로 다양하다.
도구들만 보아도 한 자루의 장도가 만들어지는 신고간난의 역정을 짐작하겠다. 장도의 모양을 결정짓는 것은 ‘보래’.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보래를 갖추고 있어야 주문한 사람의 취향대로 장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장도 장인들은 보래 욕심이 대단하다.
“보래는 본인이 직접 만든다. 장도 만드는 것보다 보래 만드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한다. 보래는 자기 제자한테 줄 수 있는 유일한 공구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거도도 중요한 도구다. 나무를 놓고 칼날이 들어갈 칼집을 파내는 톱이다. 칼집과 칼신 사이에 종이 한 장의 간격만을 허용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망치와 줄.
수없이 두드리고 수없이 깎아야 완성된 장도를 만날 수 있다.
“장도장은 장도만 만드는 게 아니라 공구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공구가 엉성하면 그 사람의 물건도 엉성하다. 공구가 완벽해야 장도가 완벽해진다.”
이제 3대의 맥을 이어갈 그이의 작업실. 아버지대부터 일해 온 공구들은 혹은 늙거나 혹은 낡았다. 허나 한결같이 닳고 닳아 수많은 상흔을 제 몸에 아로새긴 채 위풍당당.

박달나무죽절형장도(대나무 마디를 표현하여 절개를 상징 · 왼쪽) / 포도문낙죽장도(대나무에 인두로 포도문양을 새겼다 · 오른쪽)

“폭군에게는 불충이 정의”
“세상 많은 칼 중에 충효와 의리, 지조의 정신을 담은 칼은 우리의 장도밖에 없다. 나는 지금까지 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장도를 제작해 왔다.”
박종군 장인이 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배우고, 가장 늦게까지 되새겨 배운 것은 칼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장도 정신’이었다.
“장도는 부정한 것을 치는 칼이다. 폭군에게는 불충이 정의다. 장도는 한번 지은 명세를 끝까지 지키는 칼, 삿된 마음을 도려내는 칼이다.”
서늘한 기개도, 엄혹한 칼의 속성을 온유하게 감싸는 외양도 사무치게 아름다운 장도.
장도 정신을 널리 전하고자 박용기 선생이 30여 년 가족이 살아온 땅과 평생 만들어온 장도 작품을 기부채납하는 형식으로 국비와 광양시 지원으로 2006년 문을 연 광양장도박물관.
아버지의 결심을 듣고 어머니는 몇날며칠을 울었다 한다.
피땀으로 모은 땅과 장도를 바친다 하니 남은 건 빚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후회는 없었다.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광양시의 재산이 됐으니 후손들이 와서 장도에 담긴 정신을 누리기에 족하리라” 하였다. 광양 장도박물관은 전시실·전수관·체험관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장도장의 작품 300여 점과 유물 200여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오신다면 칼을 보지 말고 일편심을 새기고 가시라”

백옥은장첨자도(젓가락이 달렸다 · 왼쪽) / 목을자형장도(조선시대 · 오른쪽)

 

글 남인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출처: 전라도닷컴 http://jeonlado.com/v3/detail.php?number=13421&thread=23r01r01